이적은 1997년 김동률과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을 결성해, 후에 인순이의 리메이크로 더욱 유명해진 ”거위의 꿈“을 작사하였다. 거의 15년 후에 솔로 5집에는 ”병“을 수록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사회적 시선‘이라는 같은 주제를 놓고 희망(꿈)과 절망(병)이라는 상반된 상황을 그려냈다.
1990년대 중반은 한국 사회가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도 개인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97년 말에 있었던 경제위기 전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더욱 강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확대되었으며, 청년실업에 있어서 양적-질적 문제는 계속 심각해지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플랫폼 노동과 AI로 인해 일자리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런 와중에 청년이나 청소년의 꿈이라는 것은 과연 성립 가능한 개념인가?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때도 난 참아야 했죠“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 ”거위의 꿈“ 중에서
”도대체 왜 내 상상을 항상
감춰야 한다는 걸까
욕망은 오랜 병
지겹도록 삶을 갉아먹는 병
아무리 아닌 척 싸매어봐도
모두 침을 뱉고 피해가는 병“ – ”병“ 중에서
이처럼 상반된 정서는 음악적 분위기에서도 확연히 구분된다. ”거위의 꿈“은 서정적이고 따뜻한 멜로디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반면 ”병“은 차갑고 기계적인 느낌을 주는 전자음악적 요소를 활용해 현대 사회의 불안감을 노출한다.
가사를 살펴보아도, ”내 가슴 깊숙히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이라는 구절에서 시작하는 ”거위의 꿈“은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 헛된 꿈은 독이라고“라는 가사는 개인의 꿈을 폄하하는 사회적 시선을 드러내지만,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라고 힘차게 선언한다.
반면 ”병“에서는 ”도대체 왜 내 상상을 항상 감춰야 한다는 걸까“라며 자신의 욕망을 병리화하는 사회에 대한 절망이 드러난다. ”아무리 아닌 척 싸매어봐도 / 모두 침을 뱉고 피해가는 병“이라는 구절은 인간의 갈망을 이전에 그러했듯 꿈이라는 장치가 아니라 욕망으로 변주하며 개인이 겪는 사회적 소외와 고립을 다른 방향으로 조명한다.
이러한 차이는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거위의 꿈“이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라는 희망적 전망을 제시한다면, ”병“은 ”영원히 나을 순 없는지“라는 비관적 전망을 숨기지 않는다.
두 곡의 대비는 단순히 희망과 절망의 이분법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과 꿈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거위의 꿈“과 ”병“은 결국 당대의 현실을 바라보는 두 개의 렌즈다. 하나는 희망의 렌즈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른 하나는 절망의 렌즈로 현실의 무게를 드러낸다. 그러나 곡의 발매 시기를 보거나, 최근 ‘N포 세대’나 젠더갈등 문제 등으로 나타나는 분노와 좌절이 심화된 사회적 상황을 보건대 어느 쪽으로 흐르고 있는지는 너무 명백하다.
이적은 패닉 시절에도 그랬듯 노래에 개인적 경험을 단편적으로 담는 것을 넘어 사회적인 메시지를 은유해왔다. 언젠간 그의 음악이 다시 같은 주제로 희망을 노래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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