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베나타는 그의 저서에서 출생 자체가 심대한 해악이라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자신의 결론이 “깊이 반직관적”임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고통과 쾌락의 평가에 관해 ‘직관성’에 따라 고통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비대칭성’ 논증을 통해 이것이 유일하게 합리적인 도덕적 결론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출생에 대한 회의론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나타의 논증은 도덕적/논리적 필연이라기보다, ‘해악(Harm)’에 과도한 가중치를 두는 특정한 직관의 선택적 조합에 불과하다. 베나타가 사용하는 렌즈를 통해서는 삶이 비극으로 보일지 모르나, ‘가치 실현’이나 ‘인간적 기준’이라는 렌즈를 통하면 삶은 여전히 지속될 가치가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러한 철학적 논의가 우리를 ‘출산 금지’가 아닌, 개인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조건부 출생 윤리’로 이끈다고 본다.
1. 비대칭성 논증 분석
베나타의 비대칭성 논증은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가치 평가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한다.
| 시나리오 | 존재 | 비존재 |
| 고통 | (1) 나쁘다 (Bad) | (3) 좋다 (Good) |
| 쾌락 | (2) 좋다 (Good) | (4) 나쁘지 않다 (Not Bad) |
이 논증의 핵심은 (3)과 (4)의 비대칭이다. 베나타는 이 비대칭을 박탈(deprivation) 개념으로 정당화한다.
- (3) 고통의 부재: 존재했다면 겪었을 고통과 비교하여 ‘좋다’. 이는 시나리오 A(존재)의 그 사람의 이익을 기준으로 한 비교적 가치(relative value)다.
- (4) 쾌락의 부재: 쾌락을 박탈당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나쁘지 않다'(“The absence of pleasure is not bad unless there is somebody for whom this absence is a deprivation.”).
베나타는 이 비대칭성을 단순히 직관에만 호소하지 않고, 4개의 파생 비대칭을 통합 설명하는 능력으로 정당화한다.
- 출산 의무의 비대칭: 고통받을 아이를 낳지 않을 의무는 있지만, 행복한 아이를 낳을 의무는 없다.
- 전향적 선행의 비대칭: 행복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은 기이하지만, 비참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다.
- 회고적 선행의 비대칭: 태어난 사람에게 “태어나서 다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태어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말할 수 없다.
- 먼 고통과 부재하는 행복의 비대칭: 먼 곳의 고통은 유감이지만, 화성에 행복한 생명체가 없는 것은 유감이 아니다.
비대칭성을 불러오는 박탈 이론에 대한 검토
베나타의 ‘박탈’ 개념이 불러오는 비대칭성은 상당한 논쟁거리가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왜 ‘박탈’만이 도덕적으로 관련된 개념인가? 베나타는 “제공되지 않은 이익(benefit withheld)”과 “박탈된 이익(benefit deprived)”을 구분하며, 전자는 도덕적으로 중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분 자체가 논쟁적이다. 만약 우리가 손쉽게 제공할 수 있는 이익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정말 도덕적으로 중립인가? 이익의 부재가 박탈감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가치 상실이 도덕적으로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베나타의 논리는 “어떤 것이 좋거나 나쁘기 위해서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좋거나 나빠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베나타가 이 원칙을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비존재 상태에는 ‘누군가’가 없으므로 (3) 고통의 부재와 (4) 쾌락의 부재 모두 가치 평가가 불가능해야 한다.
만약 그가 ‘잠재적 존재(potential people)’를 포함하는 느슨한 관점을 취한다고 해도, (3)에서 “태어났더라면 겪었을 고통”을 피한 것이 이익이듯, (4)에서 “태어났더라면 누렸을 쾌락”을 놓친 것은 손실이어야 한다. 그러나 베나타는 고통에 대해서는 “존재했더라면”이라는 반사실적 가정(counterfactual assumption)을 허용하여 잠재적 주체의 이익을 챙기면서, 쾌락에 대해서는 “박탈당할 주체가 없다”며 이 가정을 차단한다. 이는 명백한 이중 잣대다. 존재하지 않는 자에게 ‘고통을 피할 이해관계’는 부여하면서 ‘쾌락을 누릴 이해관계’는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관계가 주체의 존재를 필수적으로 전제한다면 (3)과 (4) 모두 중립이어야 하고, 전제하지 않는다면 양자 모두 평가되어야 한다. 다만 베나타는 이러한 잠재적 존재에 대한 비일관성이 “명백하다”거나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만 하여 평행선을 달리게 될 뿐이다.
셋째, 베나타의 그러한 비대칭적 ‘박탈’ 가정의 ‘논리적 비일관성’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도덕적 직관’에 관한 의문점이 남는다. 그는 쾌락의 부재가 나쁘지 않은 이유로 “그 부재를 아쉬워할 사람이 없음”을 들었다. 그러나 누군가 그 손실을 인지하거나 괴로워해야만 그것이 손실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재산을 잃거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가 비록 고통을 느끼지 못할지언정 ‘실제 손실’을 입었다고 판단한다. 마찬가지로, 쾌락의 부재가 비록 비존재자에게 심리적 고통(박탈감)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현될 수 있었던 본질적 가치(intrinsic value)가 상실되었다는 점에서는 객관적 손실(기회비용의 상실)로 보아야 한다. 고통의 부재가 ‘수혜자 없는 이익’으로서 좋다면, 쾌락의 부재는 ‘피해자 없는 손실’로서 나빠야(혹은 덜 좋아야) 직관적으로도 맞다.
넷째, 베나타가 채택한 인격-관련 관점(Person-affecting view)을 명시적으로 고려해 보자. ‘부모의 기회비용’을 고려한다면, 셋째 논점과 연결하여 볼 때 아이의 비탄생은 단순히 ‘피해자 없는 손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라는 ‘실재하는 피해자의 기회비용 상실’로 볼 수 있다. 즉,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부모가 누릴 수 있었던 행복과 효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명백한 경제적·심리적 손실이다.
물론 베나타는 이 지점에서 “부모의 기회비용(즐거움의 상실)을 막기 위해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를 부모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비윤리적 행위”라고 반박할 것이다. 죄 없는 존재(아이)를 타인(부모)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가능성 속에 던져 넣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삶은 겪지 않는 것이 낫다’는 극단적 비관주의를 전제할 때만 유효하다. 만약 삶의 고통과 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인생이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a life worth living) 판단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경우 출산은 아이를 부모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긍정적인 삶의 기회’를 부여하는 상호 이익의 행위가 된다. 아이에게 좋은 삶과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단순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화’라고 매도할 수 있는가? 삶이 선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한 채 고통의 회피만을 절대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다만 이는 베나타의 비대칭성에 이은 반출생주의라는 결론 자체를 부정하고 전제로 삼는 셈이므로, 비대칭성이 잘못되었음을 이 글 후반부의 “역-비대칭성 논증”, “누구의 직관이 우선하는가?”에서 직접적으로 반박하고, 그 결과로서 “삶이 긍정적일 수 있음”을 드러내어 보겠다.
다섯째, 베나타가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한 ‘파생된 4가지 비대칭’은 굳이 그의 독특한 가치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현재 행위 주체의 인과적 통제 하에 있는 구체화된 가능성’이라는 더 보편적이고 정합적인 직관을 통해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우선 ‘출산 의무의 비대칭’을 살펴보자. 출산을 고려하는 순간, 태어날 아이는 우리 행위 범위 내의 ‘구체화된 가능성’이 된다. 따라서 그 아이의 고통과 행복은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이때 ‘고통받을 아이’의 경우, 해악 방지라는 강력한 직관이 작동하여 ‘낳지 않을 의무’가 도출된다. 반면 ‘행복할 아이’의 경우, 그 행복 역시 도덕적 가치를 지니지만, 베나타도 인정하는 “해악을 막을 의무가 이익을 제공할 의무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일반적인 윤리 원칙에 따라 ‘낳을 의무’까지로는 격상되지 않는다. 즉, 쾌락 부재가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의무의 위계 차이와 가능성의 영역에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전향적 선행의 비대칭’ 즉,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창조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지는 반면, 고통받을 존재를 창조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직관은 독립적인 가치 비대칭을 가정하지 않고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베나타가 인정하듯, 선행은 본질적으로 ‘누군가를 위해(for someone)’ 행해지는 행위이며, 이는 수혜자의 존재를 개념적으로 전제한다. 반면, 역시 베나타의 논리대로, 해악 예방은 발생 가능한 손상을 차단하는 예방적 구조를 가지며, 이는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논리적으로 완결된다.
여기에 더해,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가능성의 구체성’ 차이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창조하는 것은 명확한 주체가 결여된 미결정적 가능성의 영역에 머무는 반면, 고통받을 존재를 창조하지 않는 것은 현재 우리의 인과적 통제 내에 있는 구체적 위험에 대응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선행과 예방의 상이한 개념적 구조로부터 파생되는 이러한 인식적 차이는 창조의 영역에서도 자연스럽게 비대칭적 직관을 형성하며, 앞서 언급한 ‘해악을 막을 의무가 이익을 제공할 의무보다 강력하다’는 원칙을 뒷받침한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개념적 문법과 인식적 구체성의 차이를 더 깊은 가치론적 비대칭의 ‘표면적 반영’으로 이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베나타가 “왜 선행과 예방의 개념이 그러한 존재 조건을 갖는가?”라고 묻고 그 배후에 가치론적 비대칭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개념적 구조와 독립적으로 자신의 가치론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나 그의 가치론 자체가 ‘쾌락’, ‘고통’, ‘부재’라는 개념들의 논리적 관계에 의존하여 정식화되는 한, 이는 순환에 빠지거나 최소한 설명적 우선성을 입증하지 못한 채 남는다. 오히려 선행과 예방의 존재 조건 차이는, 이 개념들이 실제로 사용되고 적용되는 방식에 내재된 구성적 특징이며, 더 이상의 가치론적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설명 종결점으로 기능한다. 이는 단순한 언어적 관습이 아니라, 선행과 예방이라는 행위 유형의 논리적 문법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이 비대칭은 ‘쾌락의 부재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행과 예방이라는 행위 개념 자체에 내재된 존재 조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이 점이 이미 설명력을 충분히 갖는 이상, 베나타가 여기서 추가로 도입하려는 가치론적 비대칭은 설명을 심화시키기보다는 불필요하게 중복되는 가설로 남게 된다.
셋째로, ‘회고적 선행의 비대칭’은 “태어나서 다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태어나지 않아서 불행”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하는 자가 비존재를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으로 상정하여 비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태어나서 다행”), 비존재자에게 존재는 “인식 가능한 가능성”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비교 대상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태어나지 않아서 불행” 불가). 즉, 대상의 부재로 인한 논리적 불가능성일 뿐이다.
넷째로, ‘먼 고통과 부재하는 행복의 비대칭’과 관련하여 우리가 화성 생명체의 부재를 아쉬워하지 않는 이유는, 쾌락의 부재가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 행위와 인식의 범위 내에서 ‘구체화된 가능성’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성의 생명체는 우리에게 실현 가능한 고려 대상이 아니기에 도덕적 무게를 지니지 않는다. 반면, 출산 논의에서의 아이는 부모의 선택에 의해 실존 여부가 결정되는, 우리 행위 반경 내의 구체화된 가능성이다. 따라서 화성 생명체와 달리, 태어날 아이의 행복과 고통은 모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베나타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사례를 동일 선상에 놓는 범주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처럼 베나타는 자신의 직관이 4가지 현상을 가장 잘 포괄한다고 주장하며 우위를 점하려 했으나, 위와 같이 ‘가능성의 구체화’와 ‘언어적·개념적 분석에 의한 명확화’를 결합한 대안적 직관이 동일한 현상을 더 일관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섯째, 만약 베나타의 이러한 구분이 정당하며, 더 나아가 그의 논리 및 도덕적 직관에서 일관성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는 베나타가 ‘피해/해악’에 가중치를 둔 직관을 사용한 결과일 뿐이다. 위에서 보였듯 ‘가치 창출/가능성’을 중시하는 직관 체계가 여전히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다른 대안적인 직관체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결국은 베나타의 논증은 자신이 선택한 직관의 조합(직관/가치체계)의 성향을 엄밀히 밝혔을 뿐이며, 논리적이고 유일한 도덕적 결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베나타의 직관의 조합에서 나오는 결론은, 쾌락의 부재가 나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행복이 보장된 삶이라도 아주 미세한 고통(평생 단 한 번의 바늘 찔림과 같은)이 존재한다면, 그 삶은 시작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왜냐하면 비존재 상태에서는 바늘 찌름의 고통이 없고(Good), 행복의 부재는 나쁘지 않기(Not Bad) 때문에, 존재의 저울은 항상 마이너스(-)로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의 행복과 단 한 번의 따끔함을 맞바꾸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인류 보편의 이성에 부합한다. 이 사고실험은 베나타의 비대칭성 전제가 현실 세계의 가치 판단을 설명하기에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극단적임을 드러낸다. 즉 바로 이 부분이 그의 직관체계가 설득력을 잃는 지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누구의 직관이 우선하는가?” 부분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2. 역-비대칭성 논증
베나타의 비대칭성 개념은 직관을 편집하고 오독한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최소한 해악을 가장 중시하는 직관에 큰 가중치를 두었음을 보이기 위해), 동일한 구조를 사용하여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해 보겠다.
베나타는 “고통/쾌락”이라는 평가 축을 선택하고, “박탈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직관에 호소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치의 실현은 선(Good)이고, 가치의 부재는 손실(Bad)이다”라는 또 다른 직관을 사용하여 표를 재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가치와 비용을 쌍으로 구성했다.
| 시나리오 | 존재 | 비존재 |
| 가치 (쾌락/의미) | (1) 좋다 (Good) | (3) 나쁘다 (Bad) |
| 비용 (고통/위험) | (2) 나쁘지만 보상 가능하다 (Bad but compensable) | (4) 좋지 않다 (Not Good) 또는 중립 (Neutral) |
이 역-비대칭성 논증의 핵심 역시 (3)과 (4)에 있다.
첫째, 가치의 부재는 ‘나쁘다’. 베나타는 “비존재자는 쾌락을 박탈당해 아쉬워할 주체가 없으므로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텅 빈 우주를 상상해 보라. 아무도 고통받지 않지만, 아무런 사랑도, 예술도, 사유도 없는 암흑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이것을 ‘비극’ 혹은 ‘낭비’라고 느낀다. 가치는 인식 주체가 있어야 성립한다. 비존재는 ‘가치의 영원한 소멸’을 의미하며, 존재했더라면 창출되었을 무한한 가치(쾌락, 의미, 관계, 창조)가 차단된 상태(3)는 그 자체로 손실(Bad)이다.
이는 베나타의 ‘박탈’ 개념을 가져와도 동일하다. 그의 주장을 적용해 보면, 주체가 존재했더라면 가질 수 있었던 수많은 가치들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베나타는 ‘고통’에 대해서만 ‘박탈’ 개념을 적용하고 있으므로 나도 ‘가치’에 대해서만 ‘박탈’ 개념을 적용해 보겠다.)
둘째, 비용(고통)의 부재는 ‘좋은 것이 아니다’. 베나타는 고통이 없는 것을 ‘좋음(Good)’이라 했다. 하지만 수혜자가 없는 이익이 어떻게 성립하는가? “고통이 없다”는 사실이 ‘좋음’이 되려면, 그 편안함을 누릴 주체가 있어야 한다. 아무도 없는 방이 조용하다고 해서 그 방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Neutral)일 뿐이다. 혜택을 받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도덕적 선(Good)이 될 수 있는가? 따라서 (4)는 좋지 않다(Not Good) 내지는 중립(Neutral)이다.
셋째, 존재의 비용(고통)은 ‘나쁘지만 보상 가능하다’. 베나타는 고통을 절대적 악으로 규정하지만, 우리의 직관은 다르다. 운동선수가 근육을 키우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듯, 삶의 고통은 쾌락과 의미를 창출하기 위한 ‘투입 비용(Investment)’이다. 비용을 지불하고 가치 있는 것을 얻는 행위를 ‘손해(Bad)’라고 부르지 않듯, 더 큰 가치를 위해 지불된 것과 같은 몇몇 종류의 고통은 순수한 악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비용(고통)의 존재는 나쁘지만 보상 가능하다(Bad but compensable).
이 역-비대칭성 표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 존재: Good(가치의 실현, ++) + Bad but compensable(보상 가능한 고통, -에서 0) = 종합적 이익(+)
- 비존재: Bad(가치의 소멸, –) + Not Good 또는 Neutral(무의미, 0) = 종합적 손실(–)
따라서, 베나타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결론 내린 것과 정반대로, “태어나는 것이 언제나 낫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더 나아가,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우리는 우주의 가치 총량을 늘리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생명을 출산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지니게 된다.
물론 나는 이 ‘무조건적 출생주의’가 논리적으로 무결하거나 최소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만큼이나 극단적이고 반직관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 사고 실험이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베나타는 “고통의 회피”라는 소극적 직관에만 가중치를 두었고, 위의 논증은 “가치의 실현”이라는 적극적 직관에 가중치를 두었다. 어느 직관이 우월한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은 없다. 직관에 의존한 철학은 어떤 직관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뒤집힌다.
따라서 베나타의 비대칭성에 의한 논증 시도는 논리적 필연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위해 평가 축과 기준점을 자의적으로 설정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베나타는 비존재를 ‘안전지대’로 설정했지만, 나는 비존재를 ‘불모지’로 설정했다. 이렇듯 설정값만 바꾸면 결론은 뒤집힌다. 그가 사용한 동일한 방법론으로 정반대 결론이 도출되었으므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비대칭성 논증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특정 직관들의 조합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지속할 가치’와 ‘시작할 가치’의 비일관성
베나타 논증의 가장 취약한 지점은 삶의 ‘시작할 가치(Worth Starting)’와 ‘지속할 가치(Worth Continuing)’에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점이다.
- 지속할 가치: 이미 존재하게 된 이상, 죽음은 그 자체로 해악(박탈)이므로 삶을 지속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관대함)
- 시작할 가치: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의 해악을 겪을 필요가 없으므로, 아주 작은 고통만으로도 시작할 가치는 부정된다. (엄격함)
베나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존재하는 사람들은 존재에 대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이 이해관계는 일단 완전히 발달하면 전형적으로 매우 강하며, 따라서 충돌이 있을 때 손상되지 않을 이해관계를 압도한다.” 이 구분은 겉보기엔 그럴듯하나, 사실은 자의적인 기준에 불과하다.
첫째, 동일한 총량의 고통과 쾌락을 가진 하나의 삶이 있다고 하자. 이 삶이 태어나기 전에는 “시작할 가치가 없다”고 평가되다가, 태어난 직후에는 “지속할 가치가 있다”로 전환된다면, 도덕적 평가가 대상(삶)의 본질이 아니라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달라진다. 왜 시작 시점에는 그토록 엄격하던 ‘해악의 무게’가, 지속 시점에는 관대하게 다루어지는가?
둘째, 베나타가 ‘지속의 이익’(죽음으로 박탈될 미래의 좋은 경험들)을 인정한다면, 왜 ‘시작의 이익’(태어남으로써 얻게 될 미래의 좋은 경험들)은 동등하게 고려되지 않는가? 만약 미래의 좋은 경험이 삶을 지속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면, 논리적으로 그것은 삶을 시작할 이유에도 똑같이 반영되어야 한다. 평가 시점에 따라 쾌락의 가치를 다르게 매기는 것은 자의적이다.
셋째, 베나타는 더 큰 해악의 진원지를 상황에 따라 편의적으로 바꾸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찬 상태다. 논리적으로, 그 상태가 종료되는 것(죽음)은 해방이어야 한다. 그러나 베나타는 동시에 죽음이 너무나 큰 해악이기에 삶을 지속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한다.
만약 죽음이 삶의 고통을 감내해야 할 만큼 거대한 해악이라면, 인간이 겪는 진정한 비극의 원인은 ‘삶’에 있는가, 아니면 ‘죽음’에 있는가? 베나타가 죽음을 그토록 거대한 해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는 삶이 (죽음으로 잃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긍정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시인하는 셈이 된다.
반대로 만약 삶이 정말로 극도로 나쁘다면, “추가적/한계적 해악”(죽음)을 피하기 위해 “압도적 해악”(삶)을 지속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이는 위험의 크기에 대한 판단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베나타는 “삶도 나쁘고 죽음도 나쁘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비극이며, 애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인 이유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왜 죽음의 해악이 삶의 해악보다 더 크게 취급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시작 시점에서는 삶의 해악이 압도적으로 강조되고, 지속 시점에서는 죽음의 해악이 압도적으로 강조되는 이 비대칭은 비일관적으로 보인다.
넷째, 베나타는 삶을 시작할 가치가 있으려면 쾌락이 고통보다 “상당히” 커야 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삶은 결코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어떤 삶도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베나타 개인의 극단적 비관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만약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좋은 삶이 가능하다면(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느낀다면), 베나타의 논리는 반출생주의가 아니라 ‘충분히 좋은 삶을 위한 조건부 출생’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물론 베나타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을 ‘생물학적 편향’이라고 할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폴리안나 원리의 재검토’ 부분에서 다루겠다.
4. 누구의 직관이 우선하는가?
베나타는 이러한 비대칭성을 논리적으로 변호하기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는 애초부터 도덕적 직관(고통 회피가 쾌락 증진보다 우선한다)의 영역으로 변경해 방어하려 시도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비대칭성이 4개의 파생 비대칭을 설명하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추론의 최선 설명(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전략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직관들을 설명 대상으로 선택하느냐에 있다.
베나타가 선택한 4개의 비대칭은 모두 고통 회피를 우선시하는 직관들이다. 그러나 인류에게는 이와 상충하는 또 다른 강력한 직관들이 존재한다. 아래 직관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직관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
- “고통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낫다.”
베나타는 이러한 거시적 직관들을 심리적 편향(낙관 편향, 적응 기제 등)으로 설명하며 폐기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그에게 되돌려질 수 있다. 만약 대중의 삶의 긍정이 ‘생물학적 편향’이라면, 베나타의 삶의 부정은 고통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심리적 편향’이라고 규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도덕적 직관’의 본질은 절대적 법칙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작동하는 일종의 경험칙(Heuristic)이다. 따라서 직관 내부에는 필연적으로 모순되는 지점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바늘에 찔리는 고통은 나쁘다”는 미시적 직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 만하다”는 거시적 직관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그런데 베나타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고통 회피’라는 일부의 직관을 나름의 이유를 붙여 절대화하고, 그와 상충하는 대다수의 직관(삶의 긍정)은 폐기한다.
내적 모순의 가능성이 있는 직관들 중 하나만이 옳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도덕적 직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을 편의적으로 편집해 사용하는 ‘오용’에 가깝다. 베나타가 자신의 주장을 오류 없이 입증하려면 직관이라는 도구에 의존하지 않거나, 아니면 인류의 거시적 직관까지 포괄할 수 있는 더 큰 형이상학적 체계를 가져왔어야 했다.
나는 더 나아가 이것이 미시적 직관으로 거시적 가치를 낮잡아보는 환원주의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베나타는 삶을 고통과 쾌락의 파편들로 잘게 쪼갠 뒤, 고통의 조각들을 모아 “이것 봐라, 삶은 나쁘다”라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삶)을 음파 하나하나로 분해한 뒤(고통과 쾌락의 조각들) 불협화음(고통)이 너무 듣기 싫으니 음악 전체가 소음(삶은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미세한 실수(고통)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실황연주(출생)를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는 MIDI 음악과 같이 무오류(고통이 없는 비인간적 상태)가 아니라면 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사람들은 이런 주장(실황음악을 듣지 말아라. MIDI 음악을 들을 것이 아니라면 = 출생을 금지하라. 고통이 없을 것이 아니라면)에 쉽게 동의하지 못할 것이고, 그런 음악(무오류의 삶)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완벽한 기계음이 아니라, 연주자의 땀과 긴장, 그리고 간혹 섞이는 실수마저 승화시키는 인간적인 훌륭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도덕은 무결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함을 지향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충하는 직관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직관을 선택해야 하는가? 나는 베나타의 직관 조합이 기각되어야 할 이유를 세 가지 차원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첫째, 선택한 직관들 간의 정합성(coherence)이다. 도덕적 직관은 고립된 판단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다른 신념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베나타의 ‘고통 회피 우선’ 직관은 그가 동시에 인정하는 ‘삶을 지속할 가치가 있다’는 직관과 충돌한다. 만약 존재 자체가 해악이라면, 왜 죽음은 더 큰 해악이 되는가? 반면, ‘가치 실현’의 직관은 삶의 지속과 시작 모두에 일관된 긍정적 평가를 부여한다. 직관들 간의 내적 정합성 측면에서, 베나타의 체계는 자기 모순적인 긴장이 더 뚜렷하다.
둘째, 롤스가 제안한 반성적 평형(reflective equilibrium)의 관점이다. 우리는 개별 직관과 일반 원리 사이를 오가며 상호 조정함으로써 도덕적 판단에 도달한다. 베나타는 ‘고통 회피’라는 미시적 직관에서 출발하여 ‘모든 출생은 해악’이라는 거시적 원리를 도출했다. 그러나 이 원리는 “그럼에도 삶은 살 만하다”, “고통을 통해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인류의 보편적 거시 직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반성적 평형의 과정에서, 압도적 다수의 인간 경험과 배치되는 원리는 수정되거나 기각되어야 한다. 베나타는 이 충돌을 ‘심리적 편향’을 지적하여 해소하려 하지만, 이는 반성적 평형의 방법론을 거부하는 것이지 그 안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다.
셋째, 실천윤리의 합당성이다. 도덕 이론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야 한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어떤 인간 공동체도 수용하기 어려운 극단적 귀결이다. 물론 “많은 사람이 거부한다”는 것이 곧 “틀렸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덕 이론이 그것을 따르는 모든 행위자의 소멸을 요구한다면, 이는 자기 파괴적 이론이 된다. 한스 요나스가 지적했듯, 인류의 존속은 그 자체로 최우선 명령이다. 미래 세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논하려면 그 주체인 인류가 계속 존재해야 하며, 도덕적 의무를 짊어질 주체가 부재한 곳에 도덕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도덕적 주체 자체의 소멸을 귀결하므로, 이는 자기 파괴적 이론이라는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직관의 선택은 이토록 자의적일 필요가 없다. 내적 정합성, 반성적 평형, 실천적 합당성이라는 세 기준에서 베나타의 ‘고통 회피 우선’ 직관은 ‘가치 실현 가능성’의 직관에 비해 설득력이 약하다. 즉, 이는 내가 단순히 상반된 직관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합리적 논증을 통해 더 정당화 가능한 직관을 ‘선별’해낸 결과다.
5. 부모의 역할: 가해자인가 건축가인가?
베나타는 “심각한 유전병을 가진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다”라는 직관을 비대칭성의 증거로 삼는다. 그러나 이 직관은 반출생주의가 아닌 책임 있는 양육의 관점에서 더 잘 설명된다. 부모의 역할은 베나타가 함의하는 것처럼 아이를 고통의 구덩이로 던지는 ‘가해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아이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짓는 건축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 건강한 아이: 신체적·사회적 기반(토양, 집의 토대)을 제공하여 아이가 그 위에서 삶을 건축할 수 있는 상황이다.
- 심각한 유전병: 아이가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서 존엄하게 살아갈 기반 자체가 지속적으로 붕괴되는 상황이다. 이는 건축의 실패가 예견된 상황이다.
우리가 유전병 사례에서 출산을 하지 않는 선택을 한 부모에게 칭찬을 할 수도 있는 이유는 베나타 식의 “태어남 자체가 해악”이라서가 아니라, 부모로서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을 제공할 수 없거나 난이도가 너무 높아지기 때문(존재하게 될 아이의 고통뿐 아니라, 양육할 부모의 심각한 고통 발생)이다.
베나타는 아마 모든 인간에게 “멀쩡한 집(고통 없는 삶)은 없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인간은 삶의 일부분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긍정한다. 베나타는 이를 모두 ‘착각’으로 치부하지만, 이는 뒤이어 다룰 폴리안나 비판에서 보듯 입증 불가능한 독단적 신념일 뿐이다. 또한 “모든 삶에 고통이 있다”는 참이지만, “모든 고통이 존재를 압도한다”는 명제는 증명할 수 없는 거짓이다. 무너지는 집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건축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오직 ‘튼튼한 집을 짓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건부 의무를 도출할 뿐이다.
또한 베나타는 ‘아이는 출생에 동의할 수 없다. 동의 없이 타인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첫째, 부모는 아이를 단순한 ‘위험’이 아니라 ‘가능성’에 노출시키는 것이며, 이후 내가 제시할 조건부 출생 윤리에 따라 부모는 아이의 가능성을 행복으로 귀결시키기 위한 토양을 제공하려 부단히 노력하게 된다.
둘째, 동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동의 불가능성 자체가 행위를 금지하지는 않는다. 동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타인의 삶에 개입할 때, 도덕적 기준은 ‘사전 동의’가 아니라 ‘미래의 주체가 합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가(스캔런)’에 있어야 한다. 그에 더해 부모는 아이를 자신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며(칸트적 입장), 그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을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스캔런, 롤스적 입장).
칸트적 관점에서 도덕적 문제의 핵심은 동의의 물리적 부재가 아니라, 그 대상을 ‘수단’으로만 대우하는지, 아니면 ‘목적’으로 대우하는지에 있다. 만약 부모가 자신의 노후 대비나 단순한 쾌락을 위해 아이를 낳고 방치한다면, 이는 아이를 수단화한 폭력이 맞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를 독립적인 도덕적 주체로 길러내겠다는 ‘완전한 의무’를 짊어지고 건축가로서 헌신한다면, 이는 미래에 이성을 갖게 될 존재가 보낼 ‘이성적 동의(Rational Consent)’를 전제한 정당한 초대가 된다.
베나타가 그랬던 것처럼,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원용해 보자면, 합리적인 당사자는 부모가 삶의 기본가치를 보장한다는 전제하에 ‘조건부 존재’를 선택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한 스캔런의 ‘합당한 거절 불가능성’ 원칙에 따라, 부모가 충분한 사랑과 책임으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면 아이는 자신의 탄생을 합당하게 거절하기 어렵다. 즉, 재생산은 단순한 생물학적 본능을 넘어, 타자에게 자율성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고도의 도덕적 기획인 것이다.
물론 롤스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사고실험을 했으나, 베나타의 시도대로 이를 약간 변용하여 이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합리적이라는 가정 하에 ‘가상적 계약’ 개념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즉, 태어날 아이가 자신이 어떤 운명일지 모르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뒤에서 탄생 여부를 결정한다고 가정해 보자. 베나타는 그들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 비존재를 택할 것이라 주장하겠지만, 합리적인 당사자라면 부모가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기본가치를 보장하거나 최소한 부단히 노력한다는 전제하에 ‘조건부 존재’를 선택하는 계약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즉, 부모가 아이의 삶을 지탱할 ‘건축가’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이는 아이와의 가상적 계약을 성실히 이행한 정당한 행위가 된다.
베나타는 롤스의 최소극대화 원칙을 적용하면 최악의 경우(존재하게 됨으로써 얻는 고통)을 최대한 고려해야 하므로 출생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즉 무지의 베일 속에서 그 사회의 최소 수혜자로 태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최소 수혜자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안전성을 극대화하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만족을 보호하는 방법이 바로 반출생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 첫째로, 이것은 롤스 이론에 대한 전반적인 반박인데, 기대효용 극대화 측면에서 확률을 고려한 평균적 결과를 최선으로 만들려는 전략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즉 무지의 베일 속에서도 대부분의 삶이 괜찮다면 출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최소극대화 원칙을 적용하더라도 ‘조건부 출생 윤리’가 전제된 사회라면 최악의 경우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열악한 조건의 존재’로 재정의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베나타는 어차피 모든 삶이 고통이라고 전제하는데, 그렇다면 그 안에서 ‘최소’를 극대화한다는 논리 자체가 성립하는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반출생주의는 롤스의 원칙을 통하든, 통하지 않든 도출되지 않는다.
아마 베나타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탄생을 거절할 것이며, 대다수의 거절하지 않음은 심리적 편향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도덕 원리는 일부의 예외를 허용하며, 중요한 것은 대다수가 합당하게 거절할 수 없다면, 그리고 그것이 심리적 편향만이 아니라 실제 가치 판단이라면, 이는 상당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도덕적) 행위에는 불확실성이 수반되며, 합리적 기대치를 충족하면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사후적 거절 가능성만으로 사전적 행위를 금지하면,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거의 모든 행위가 금지되며, 사람들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다.
6. 어떻게 개인의 행복을 평가할 것인가?
베나타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것을 ‘폴리안나 효과(낙관 편향)’와 적응 기제 등의 탓으로 돌리며, 객관적으로는 모든 삶이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자기기만이다”라는 주장은 반증 불가능한 주장이다.
- 삶이 괴롭다고 하면? → 베나타의 증거가 된다.
- 삶이 행복하다고 하면? → 자기기만의 증거가 된다.
만약 이것이 반증 가능한 주장이라고 하여도, 베나타가 나열한 일상적 불편함(배고픔, 피로 등), 생로병사, 폭력이나 전쟁, 재난, 죽음과 같은 객관적 고통에 대해 객관적 나쁨을 어떻게 측정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베나타가 제시한 ‘편향’ 없는 객관적 좋음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가 고통이나 위험에 대해서만 너무도 과대평가 하는 것이 아닌가?
베나타가 제시한 주관적 안녕감이 객관적 조건과 괴리된다는 심리학적 연구들의 함의는, 삶의 질이 객관적 조건(그 중에서도 특히 고통의 총량)으로만 환원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증거로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인간의 ‘적응’ 능력은 인간 종의 강점이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삶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베나타는 적응 능력이 우리를 속인다고 이야기한다. 객관적으로 나쁜 상황을 덜 나쁘게 느끼게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객관적으로” 나쁜가? 만약 당사자가 나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말 나쁜가?
물론 ‘적응적 선호(adaptive preference)’나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주관적 만족이 객관적으로 압도적인 비참함을 가리는 특수한 경우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교 가능한 일반적, 정상적 상태(자유인, 건강함 등)가 존재할 때 성립하는 개념이다.
하이데거가 통찰했듯, 인간 존재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그 ‘유한성(Finitude)’에서 온다. 영원하지 않기에 시간은 귀하고, 잃어버릴 수 있기에 사랑은 절실하다. 베나타는 죽음(집의 붕괴)을 근거로 건축 자체를 반대하지만, 부모는 아이에게 ‘무너질 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기에 빛날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베나타가 제시한 압도적인 고통의 예시인 생로병사는 특수한 비정상적 상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실존적 조건이므로 정상적 상태다. 비교할 수 있는 대안(비존재)은 경험 불가능한 상태이므로, 이를 근거로 “현재의 만족은 착각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외에 베나타의 ‘행복한 노예’에 관한 비유 역시 ‘모든’ 인간이 노예라면 ‘노예’란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동일하게, 베나타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는 착각에 빠진 ‘환자’라면, 그러한 현상을 질병이라고 부르고, 더 나아가 그 사람들을 환자라고 부를 수 있는가?
베나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만약 어떤 행성에 심각한 두통을 겪는 존재들만 산다면, 그들의 고통은 객관적인 고통이 아닌가? 인간이 삶을 긍정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집단적 착각일 뿐이다.” 이에 대해 답하자면, 우선 이 사고실험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종족이 경험하는 감각이 우리가 ‘두통’이라 부르는 것과 동일한 불쾌한 감각을 가진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는 자명하지 않다. 만약 그들이 우리에게 ‘두통’처럼 보이는 신경학적 패턴을 가지지만, 그것을 주관적으로는 중립적이거나 심지어 즐겁게 경험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매운 음식에서 느끼는 통증 신호를 즐거움으로 전환하듯, 그들에게 ‘두통’은 애초에 고통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베나타의 사고실험이 성립하려면, 그 종족이 해당 감각을 실제로 불쾌하게 느낀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전제 하에서라도, 만약 그 두통이 그 종족이 존재하고 사유하며 사랑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필연적 조건이라면, 그들은 두통을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삶의 세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고통에 무기력하게 순응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종족 또한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동시에 두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베나타가 지적하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가치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애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개선의 노력이 곧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두통이 객관적인 ‘통증(pain)’임은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곧 주관적인 ‘불행(suffering)’이나 존재 자체가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각적 고통이 실재하더라도, 그것을 삶의 무의미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더 나아가 다른 창조적인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통의 ‘나쁨’이 감각 그 자체의 객관적 속성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주체의 평가와 인식, 그리고 의미 부여에 의존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베나타의 논증은 결정적인 자기모순에 직면한다. 그는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감을 ‘진화적 편향’이나 ‘착각’으로 치부하여 그 가치를 격하한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긍정적 주관성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면, 논리적 일관성에 따라 고통이라는 부정적 주관성의 실재성 또한 부정되어야 한다. 만약 “나는 행복하다”는 느낌이 뇌의 기만이라면, “나는 아프다”는 느낌 역시 신경계의 전기적 신호에 불과할 뿐, 그것이 객관적으로 ‘나쁜’ 것임을 담보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베나타는 자신의 논증을 위해 주관적 경험의 권위를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행복은 가짜라고 의심하면서 고통은 진짜라고 확신하는 태도는, 그가 비판하는 ‘편향’과 다를 바 없다. 주관적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여 행복을 무효화하는 순간, 베나타가 삶을 부정하는 유일한 근거인 ‘고통의 나쁨’이라는 토대마저 함께 무너지고 만다.
베나타의 논증이 보편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모든 의식적 존재가 고통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평가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이는 경험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입증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대부분 삶에 만족한다는 것이 ‘체계적 편향’일 수 있다는 베나타의 비판의 요지는 이해한다. 나도 일부 조건(극심한 고통, 빈곤, 폭력)은 객관적으로 나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인간의 삶의 조건은 상당히 복잡하다. 동일한 객관적 조건도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출산의 고통을 ‘출산’이라는 질병의 고통으로 볼 것인가? 도전의 어려움을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가하는 ‘성공을 막기 위한 억압’에 따라 받는 고통으로 볼 것인가? 결국은 각 개인이 맥락을 해석하는 방식이 객관적 조건과 (그 비율까지는 모르겠으나) 양립하여 ‘행복’과 ‘고통’을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엔 인간의 적응 기제는 베나타가 평가하는 것처럼 ‘심리적 편향’이 아닌 ‘놀라운 회복력이자 인간 종의 강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으며, 이는 결국 존재하는 사실(행복한 인간)에 대한 해석과 인식의 차이가 된다.
7. 결론: 삶에 대한 회의론이 아니라 강화된 책임이 필요할 뿐
데이비드 베나타의 반출생주의는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필요한 진실을 던진다. 삶에는 분명 지울 수 없는 고통이 존재하며, 타인을 이 세계로 데려오는 일은 엄청난 도덕적 무게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생명은 무조건 축복”이라는 순진한 낙관론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해독제가 주식이 될 수는 없다. 고통이 두려워 존재의 가능성 자체를 영원히 봉인하자는 그의 결론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그의 논증은 의도와는 달리 반출생주의를 논리적으로 확증하지 못했다. 핵심적인 전제인 비대칭성과 도덕적 직관성은 논리적 필연이 아니라 그가 달성하고자 목표한 비관적 직관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적 허점을 걷어내고 남는 유의미한 교훈은 간단하다. 출생은 도덕적 공백 상태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타자의 운명에 개입하는 막중한 도덕적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출산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더 무겁게 대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유전자를 남기는 행위가 아니라, 한 인간이 짊어질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어 지겠다는 숭고한 계약이자 약속이어야 한다.
조건부라 함은 베나타 식의 고통의 완전한 부재를 요구하는 수준(비인간적 수준)으로 성취 불가능한 기준이 아니라,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태어날 존재가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그 삶을 긍정하여, 결국 행복한 삶을 지어낼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칸트가 말한 대로 아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하며, 롤스가 제시한 최소한의 기본가치를 보장하고, 스캔런의 관점에서 훗날 아이가 자신의 삶을 비난하지 않도록 양육해야 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책임을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삶이란 베나타의 주장처럼 무조건 제거해야 할 위험과 고통이 아니라, 책임 있게 준비하여 열어주어야 할 가능성이 된다.
물론 베나타는 이에 대해서도 내가 제시한 조건이 충족될지 불확실하며 실패의 비용은 아이가 부담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확률적이다. 이에 대해 합리적 주의를 기울이고, 위험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부모로서 실패에 대한 상당한 책임(비용)을 진다는 점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나는 책임지면 끝이라는 식으로 부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베나타 식의 과도한 완벽주의를 경계하려는 것이다. 어떤 삶도 완벽하게 고통 없을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출생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불가능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것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많은 인지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제시한 조건부 출생 윤리는 베나타의 논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유일한 대안이라기보다, 그의 문제 제기를 수용하되 그 결론을 거부한 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책임 있는 윤리적 태도다. 물론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출생이 정당화되는지,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를 더 상세히 밝히는 일은 매우 논쟁적이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이 생긴 대로 살아가며 재생산하는 일이 비도덕적이라는 비논리적인 결론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이 논쟁적 과업을 짊어지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인간다운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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